“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거는 어디에 맺히는가.” – 이동진
저명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2025년 첫 만점을 선사한 영화 『브루탈리스트』에 남긴 평입니다. 단 10개의 글자로 3시간 35분짜리 대서사시의 본질을 꿰뚫은 이 문장은, 영화와 건축이라는 두 예술 형식이 어떻게 서로의 언어를 공유하는지 보여줍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의 야심작 『브루탈리스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헝가리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미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건축 철학을 구현하고자 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과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IMDB 7.9/10, 로튼토마토 신선도 94%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국제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한 이민자 서사나 예술가 전기를 넘어섰습니다. 영화는 콘크리트라는 단단한 물질 속에 개인의 트라우마와 사회적 편견, 그리고 예술적 열망이 어떻게 녹아들어 가는지 세밀하게 포착했습니다.
브루탈리즘 건축의 날것 그대로의 거친 표면처럼 타협 없는 비주얼과 서사를 선보이는 이 영화는 건축을 단순한 배경이나 소재가 아닌, 서사적, 시각적 틀로 활용하며 영화 매체의 가능성을 확장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브루탈리스트』가 어떻게 건축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내면의 풍경을 구축하는지, 그리고 브루탈리즘 건축이 지닌 미학적, 정치적 함의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의 이해
브루탈리즘(Brutalism)이란 이름은 얼핏 ‘잔인함(brutal)’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어 ‘브뤼트(brut)’, 즉 ‘날것 그대로의’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이 건축 사조는 모더니즘 건축의 한 갈래로, 가공되지 않은 재료와 구조의 솔직한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브루탈리즘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노출 콘크리트(béton brut)의 사용입니다. 이는 콘크리트 표면을 마감재로 덮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기법으로, 건축의 구조와 재료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솔직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사회적, 경제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되는 사회에서 콘크리트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값싸고 견고한 이 재료는 빠른 재건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 거친 표면은 전쟁의 상흔과 복구 과정의 고통을 드러내는 듯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브루탈리즘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을 넘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건축 사조였습니다.
브루탈리즘은 그 단순하고 정직한 표현 방식으로 인해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추한’ 건축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라즐로의 혁신적인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는 브루탈리즘이 직면했던 실제 역사적 수용과정과 맞닿아 있으며, 예술가의 비전과 대중의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브루탈리즘은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한때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라 여겨졌던 이 건축 양식은 이제 솔직함과 진정성의 상징으로, 더 나아가 특정 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이러한 재평가의 맥락에서 브루탈리즘을 재조명하며, 건축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깊은 상처와 열망을 담아낼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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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공간 분석: 라즐로 토스의 건축 철학
영화의 중심에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가 있습니다. 이 건축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영화의 서사적, 시각적 중심축으로 기능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의뢰한 이 프로젝트는 “도서관, 극장, 체육관, 예배당이 합쳐진 커뮤니티 센터”로 설계되었습니다.
라즐로의 건축 설계 과정은 영화에서 상세히 그려졌습니다. 그가 마분지로 만든 건축 모형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는 장면은 건축이 어떻게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매체인지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그가 손전등으로 “해가 정오에 위치했을 때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빛의 자연조명효과”를 시연하는 장면은 건축 공간에서 빛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센터의 물리적 특징들은 브루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의 대담한 사용, 기하학적 형태, 그리고 구조의 솔직한 표현은 모두 이 건축 사조의 핵심 요소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가져온 특별한 대리석이 센터의 제단에 놓이는 것은 브루탈리즘이 단순히 거친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의 본질과 특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에서 건축 공간은 인물 간 권력 관계와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습니다. 해리슨의 호화로운 저택과 라즐로가 임시로 거주하는 가구점 창고의 대비는 미국 사회 내 이민자의 위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해리슨이 일방적으로 설계 변경을 요구하는 장면들은 창작자의 비전과 후원자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그려냈습니다.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는 단순한 건물을 넘어, 라즐로의 건축 철학이 구현된 공간이었습니다. 그가 설계한 공간들은 기능적 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빛과 공간을 통해 사용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완성된 센터의 내부, 특히 예배당에 십자형태의 달빛이 비추는 장면은 라즐로가 추구한 공간적 경험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브루탈리스트 창작 근원
『브루탈리스트』는 예술 창작의 근원을 탐구하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라즐로 토스의 건축은 깊은 내면의 상처와 기억이 물리적 형태로 승화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영화는 트라우마가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로 변환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치유의 역학을 섬세하게 포착했습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라즐로의 과거는 영화 전반에 깔린 그림자처럼 존재했습니다.
“나치들이 제 건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담담한 고백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은 나치에 의해 파괴된 예술적 유산과의 연결성을 의미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밝혀지듯,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는 라즐로가 수감되었던 강제수용소의 구조를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재해석하는 예술적 과정을 상징했습니다.
라즐로는 자신을 파괴했던 공간의 형태를 차용하되, 그것을 커뮤니티와 문화, 소통의 장소로 변형시켰습니다. 이는 고통의 공간을 치유와 성장의 공간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헤로인 중독으로 이어지는 라즐로의 자기 파괴적 행동은 트라우마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에르제벳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헤로인을 투여하는 장면은 고통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려는 시도지만, 결국 그들을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예술 창작이 트라우마를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함을 암시했습니다.
영화는 트라우마의 세대 간 전이를 조카 조피아를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실어증을 앓는 조피아는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의 충격에 반응했습니다.
그녀의 침묵은 라즐로의 건축적 표현과 대비되면서도, 둘 다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예술 창작이 단순한 미적 충동이 아닌, 깊은 내면의 상처와 기억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라즐로가 콘크리트와 공간을 통해 표현한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존의 고통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의지였습니다.
이민자 경험:시각적 은유
『브루탈리스트』는 미국 사회 내 이민자의 복잡한 경험을 건축과 공간이라는 시각적 언어를 통해 탐구했습니다.
라즐로 토스의 여정은 전후 미국으로 건너온 많은 유럽 이민자들, 특히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경험을 대변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라즐로가 미국에 도착하는 장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비치는 모습은 ‘아메리칸 드림’의 왜곡된 실체를 암시했습니다. 이것은 희망과 현실 사이의 괴리, 약속된 자유와 실제 경험되는 제약 사이의 간극을 시각화했습니다.
영화는 이민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새로운 사회에 동화되는 것 사이에서 겪는 갈등을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아틸라는 “미국인처럼 살고자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미국식 이름을 쓰며 천주교로 개종”하는 극단적 동화의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라즐로는 자신의 유럽적 배경과 건축 철학을 고수하면서도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 노력했습니다.
언어는 이민자 경험의 중요한 측면으로 섬세하게 다루어졌습니다. 해리슨이 “라즐로의 영어발음은 구두닦이 같으니까 아내분이 좀 고쳐주시라”고 모욕하는 장면은 이민자들이 경험하는 언어적 차별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르제벳이 옥스포드에서 영어를 공부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해리슨의 불편함을 자극하는 것은 이민자의 능력이 때로는 위협으로 인식되는 역설적 상황을 드러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서 조피아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려는 결정과 라즐로 부부가 미국에 남기로 하는 선택은 각기 다른 이민자 적응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조피아의 선택은 유대적 정체성의 재확립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반면, 라즐로의 결정은 미국 사회 내에서 자신의 공간을 계속해서 구축하려는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의 완성은 라즐로가 마침내 미국 사회 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그의 유럽적 경험과 미국적 맥락을 하나의 건축물로 통합시키는 과정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이민자 경험의 본질—두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브루탈리스트』가 말하는 건축과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시각적 언어는 브루탈리즘 건축의 미학을 영화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빛과 그림자, 질감과 공간을 통해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하는 독특한 시네마토그래피를 구축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과거는 어디에 맺히는가”라는 평은 이 영화의 시각적 전략과 주제적 탐구를 정확하게 포착했습니다.
영화는 노출 콘크리트의 거친 표면과 기하학적 형태를 시각적 모티프로 활용했으며, 이는 인물의 내면 풍경과 공명했습니다.
카라라 채석장 장면에서 물을 적신 대리석이 청금색 빛을 드러내는 순간은 표면 아래 숨겨진 아름다움, 즉 라즐로가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숨겨진 진실의 은유였습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완성된 센터의 예배당에 십자형태의 달빛이 비추는 장면은 영화의 시각적, 주제적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이 장면은 라즐로가 초기에 구상했던 빛의 효과가 실현된 순간으로, 과거의 어둠에 현재의 빛이 스며드는 메타포이자, 트라우마가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의 시각화였습니다.
영화는 또한 공간과 구도를 통해 인물 간 권력 관계를 표현했습니다. 해리슨의 넓은 저택과 라즐로의 비좁은 공간, 공사 현장에서의 위계적 구도는 미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이민자의 위치를 반영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전략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를 넘어 영화의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와 깊이 연결되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결국 건축과 영화라는 두 예술 형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었습니다.
건축이 공간을 통해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예술이라면, 영화는 시간을 통해 공간을 경험하게 하는 예술입니다. 이 영화는 이 두 매체의 교차점에서, 공간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과 역사,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반영하는지 탐색했습니다.
현대 한국 관객들에게 『브루탈리스트』는 단순한 역사적 드라마를 넘어,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개인의 트라우마 치유, 이민자와 소수자의 경험 등 현대 사회의 여러 이슈와 공명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브루탈리즘 건축이 한때 비판받다가 오늘날 재평가받는 것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외면했던 가치와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제안했습니다.
마치 라즐로가 콘크리트라는 거친 재료를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했듯이, 『브루탈리스트』는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을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켰습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조차 의미 있는 무언가로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빛이 콘크리트의 거친 표면을 비출 때 드러나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처럼, 인간의 가장 어두운 경험조차 예술을 통해 변형되고 초월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브루탈리스트』 영화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가요?
A: 『브루탈리스트』는 완전한 픽션이지만, 20세기 중반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출신 건축가들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과 그 시대의 사회적 맥락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합니다. 감독 브래디 코베는 바우하우스 출신 건축가들과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다양한 기록을 연구하여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Q2: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는 실제로 존재하나요?
A: 마가렛 리 밴 뷰런 센터는 영화를 위해 창작된 가상의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건물의 디자인은 르 코르뷔지에, 마르셀 브로이어 등 실제 브루탈리즘 건축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영화 촬영을 위해 실제 세트가 제작되었으며, 일부 장면은 실존하는 브루탈리즘 건축물에서 촬영되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루이스 칸의 솔크 연구소, 르 코르뷔지에의 라 투레트 수도원 등 실제 브루탈리즘 건축의 대표작들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Q3: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브루탈리즘 건축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무엇이 있나요?
A: 브루탈리즘 건축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다음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도서: 안도 다다오 전집 책 건축 설계 디자인 거장 작품 건축물 관련 서적 책자
- 다큐멘터리: BBC의 ‘Bunkers, Brutalism and Bloodymindedness: Concrete Poetry’
- 웹사이트: SOS Brutalism(전 세계 브루탈리즘 건축물 아카이브)
- 국내 브루탈리즘 건축물: 젠틀몬스터 사옥, 뮤지엄 산등
- 인스타그램: @brutgroup, @brutal_architecture(브루탈리즘 건축 사진 계정)